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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택

지수2 2008. 10. 20. 20:09
농암종택

'어부가'로 이름이 알려진 조선시대 학자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의 종택으로 경북 안동 도산면 가송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농암선생의 유적은 원래 도산면 분천리 일원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후손들이 도산면 가송리에 20,816㎡의 부지를 마련하고, 안동시에서 총 33억원 지원받아 농암선생 유적지 정비사업을 마무리 했습니다.

◐* 대문 *◐ ◐* 사랑채 *◐ ◐* 긍구당(肯構堂) *◐ 긍구당은 농암 이현보가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했던 곳. 문 정면에 서 있는 별채로 고려시대 때 농암 선생의 고조부가 지은 건물입니다. 조선시대 명필 신잠(申潛)이 글씨를 쓴 현판이 우아합니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라'는 뜻입니다. ◐* 분강서원(汾江書院) *◐ 분강서원은 1699년 사림이 농암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 ◐* 애일당과 강각 *◐ ◐* 애일당(愛日堂) *◐ 1512년, 농암은 분강 기슭에 부모를 위해 정자를 지어 '애일당'이라 했습니다. '애일'은 '하루하루의 날을 사랑한다'는 뜻이니, '애일당'은 곧 '하루하루의 날을 사랑하는 집'이며, 정확하게는 '부모님이 살아계신 나날들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 강각(江閣) *◐ 1512년 전후, 애일당 아래 분강의 강가에 농암이 지은 집으로 전망이 좋으며, 강각 옆 축대에는 농암선생이 각자를 새긴 돌이 있습니다. 이 각자는 '농암선생정대구장'이라고 두 글자씩 음각으로 새겼고. 원래 분천리 옛 애일당터에 있던 것을 글자 부분만을 잘라 다시 옮긴 것입니다. '농암'은 원래 이현보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분천 강가의 큰바위 이름이었는데 훗날 이것으로 호를 삼았다고 합니다. 그는 혼란한 세상 속에서 이 바위처럼 귀먹은 듯 초연히 살기를 원했으며, 벼슬에서 물러난 후 분천 강가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하면서 강호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다가 이 곳에서 삶을 마쳤습니다. ◐* 농암종택 전경 *◐
농암은 70세가 넘은 나이에 부모의 생신 때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때때옷을 입고 재롱을 부렸다고 하여 '때때옷의 선비'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조선을 대표할 만한 선비로 영남에서는 농암과 퇴계를 꼽고, 호남에서는 송강 정철을 손꼽습니다. 농암은 강호의 미(美)를 추구하던 청백리며 문학가였고, 자연을 노래한 이른바 강호 문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항을 끼쳤습니다. 76세에 관직 생활을 끝내고 낙향한 후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아름다운 노래로 표현하였는데, 특히 전래되던 '어부가'에 심취하여 가사의 순서와 내용을 바로잡고 다듬어 새로운 '어부가'를 만들었습니다. "만사 무심히 오직 낚싯대에 뜻을 두니 정승의 자리라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네. 돛 내려라 돛 내려라, 산 계곡에 비바람 치니 낚싯줄 거두리라. 찌그덩 찌그덩 어엿샤, 평생 자취가 푸른 물결에 있네.(어부가 중에서)" 이현보의 이러한 문학 활동은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강호시가(江湖詩歌)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 종택을 지키며 후손으로서 농암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 있는 농암의 17대손 이성원님이 최근에 펴낸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라는 책을 사들고 가서 직접 서명을 받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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