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부제 : 2000여 년 간의 시간 공간 여행
2016. 11. 27.(일) ~ 12. 2.(금) 5박 6일간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연수를 다녀왔다. 김해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의 후쿠오카~시모노세키~(페리)~오사카~교토의 여정이었다. 교사 249명과 진행 팀 등을 포함하여 약 300명이 함께 하였다.
출발하기 전에 “선조들이 밟았던 문화전달 경로를 따라 이동하며 찬란한 한민족 문화의 전달과정을 일본현지에서 직접 확인하고 국내 최고 권위의 역사전문가의 상세한 현장강의를 통해 한일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역사탐방 프로그램”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답사 지역은 총 16곳이었다.
규슈 | 신라 공격에 대비한 방어 거점 다자이후 백제와의 연결 고리 후나야마 고분 조선 침략의 전진 기지 나고야 성터 일본 도자기의 원류 이삼평 도예지 한반도의 농경 문화가 전래된 요시노가리 유적 |
시모노세끼 | 조선통신사의 숙소였던 아카마신궁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현장 청일강화기념관 일본의 지중해 세토나이카이 |
나라 |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 도다이지 삼국시대 문화의 종합판 호류지 가장 확실한 고구려 문화의 흔적 다카마쓰 고분 백제 왕흥사를 모델로 한 아스카테라 |
교토 | 신라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고류지 일본 권력의 변혁과 함께 한 니조성 |
오사카 |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의 성 오사카성 오사카 한국인 학교 백두학원 건국학교 |
1. 일본 고대문화에 숨쉬고 있는 한민족의 흔적들
일본 규슈 섬에는 한반도 고대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대 한국인들의 벼농사와 철기문화 등 선진국의 힘이 원시적 미개 상태였던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을 지배했던 뚜렷한 흔적이다. 신라 공격에 대비한 방어 거점인 ‘다자이후(大宰府)’, 백제 왕가적인 유물들이 잔뜩 쏟아져 나온 ‘후나야마 고분’(船山古墳), 한국계 청동기 무문토기가 나와 한국의 세형동검집단이 고대 일본사회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는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이 그러하다.
일본 나라에서도 한반도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채색 벽화가 출토되어 가장 확실한 고구려 문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다카마쓰’ 고분, 백제의 왕흥사를 모델로 한 ‘아스카테라’(飛鳥寺), 금동좌불상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로 유명한 743년 건축된 동대사의 대불전 옆 언덕에 있는 ‘신국사’(辛國社, 가라쿠니신사)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국신'을 모시던 곳이다. 고구려 승려 담징의 금당벽화로 우리에게 친숙한 ‘호류지’(法隆寺)는 중국과 한반도의 불교 건축과 예술이 일본에 건너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아시아 미술의 보고'로도 불린다. 호류지에는 아스카, 나라 시대의 불상, 그림 등 다양한 명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전시물은 백제관음이다. 머리에 드리우고 있는 투조보관과 양옆의 수식에서부터 두 발을 딛고 있는 연화대에 이르기까지 7세기 초 백제 장인의 솜씨가 확연하고, 이는 당시의 일본이 한반도의 직접적인 문화적 영향권 하에 있었음을 나타낸다.
일보 교토 ‘고류지’(廣隆寺)에서도 신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의 국보 1호 미륵반가사유상은 신라 진평왕이 보낸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2. 왜구와 임진왜란과 조선통신사
왜구는 남북조 혼란기의 남조 세력권에 있던 규슈 일대의 일부 지방 세력들이 해적화한 것으로 한반도와 중국 연해안을 침략하였다. 왜적의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빈번하였으며 고려 말, 조선 초에 가장 심했다. 조선 초에 왜구가 계속되자 세종은 이종무에게 쓰시마를 정벌하고, 이후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회유책으로 일정 규모의 무역을 허락하였다. 원래는 일본인이 눌러 앉아 살 수 없도록 했지만 점점 이 규정을 어기는 일본인이 늘어나 재팬 타운(Japan Town)이 형성되고 삼포는 국제 무역항으로 성장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과 일본의 상황은 어땠을까? 당시 조선은 일본을 대마도 건너에 있는 섬나라로 평소에 왜구들이 와서 약탈이나 하는 해적들의 나라 정도로 생각한 반면, 당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대마도의 왜구들이 심심하면 침략하는 만만한 땅이라고 생각했다. 1592년 부산 앞바다에 일본 배가 나타나자 보고를 받은 부산진에서는 이를 조공하기 위해 온 배라고 판단할 정도로 전쟁에 대한 대비에 없었고 일본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규슈 사가현 ‘가라쓰’(唐津)시에는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과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쌓았던 전진 기지가 있다. 그것은 임진, 정유왜란의 시작이며 그 군사거점으로서 구축된 ‘나고야성’(名護屋城)과 각 다이묘(각지의 지배자)들의 진영이다. 이 특별사적 <나고야성 유적 및 진영터>는 동아시아 각국과의 불행한 과거사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기는커녕 신하들이 편을 나누어 서로가 권력을 다툼을 하느라 일본의 침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여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있던 일본에 비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부정적이었던 조선은 무기가 보잘 것이 없었고, 별다른 준비 없이 일본의 공격을 받은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에서 ‘도요도미 히데요시’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면서 일본은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구조개혁을 통해 근세 일본의 기초를 닦는다. 이와 관련 유적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의 히데요시에 의해 축성된 ‘오사카성’(大阪城),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교토에 머물 때 묵었던 거처인 ‘니조성’(二條城)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려 했으나 이순신 장군이 노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잡음으로써 7년간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긴 전쟁으로 조선의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고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농민 생활은 극도로 힘들어지고 수많은 문화재가 유출되었다. 전쟁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과 유학자는 일본 문화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도조라 불리는 이삼평은 사가현 아리타의 도자기로 일본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도자기 명가를 이루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과의 모든 교역을 끊고 더 이상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지 않았다. 일본의 지속적인 요청에 조선은 1607년 다시 통신사를 보내게 되었다. 나라 내부의 상황을 살피고 양국의 교류를 위한 외교 사절단인 조선 통신사는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 통신사가 오고갈 때마다 일본에서는 조선의 문화가 유행하였다. 이처럼 조선통신사는 조선 시대 ‘한류’였다.
임진왜란 이후 200년 간 12차례에 걸쳐 일본과의 평화우호를 위해 조선에서 파견했던 조선통신사가 11차례 숙소로 사용한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은 일본 세토내해의 입구인 시모노세키에 있다. 그 바로 옆에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下関条約)을 맺은 장소인 청일강화기념관이 있다. 일본은 1895년 3월 20일 ~ 4월 17일까지 계속된 강화회담에서 조선의 독립, 랴오둥 반도·타이완·펑후 열도 할양, 배상금 2억냥 등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이끌고 와서 일본을 강제 개국시킨 지 불과 40여년 뒤에 서양 여러 나라와 맞먹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다. 조선 정부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반겼다. 조약 제1조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확인한 것은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을 청국의 세력권에서 떼어내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수순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정부는 이런 위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와 일본의 의도를 읽지 못한 조선은 결국 이후 열강들이 벌이는 세력 다툼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말았다.
3. 오사카 건국학교와 규슈 올레
오사카 건국학교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 자녀들에게 모국과의 연계교육 및 현지 적응교육을 실시하는 민족학교이다. 1946년 4월 일제 강점기 때 강제 징용에 끌려왔던 동포들은 조국의 해방과 함께 '백두동지회'를 결성하고 독립조국 건설에 기여할 인재를 키우자는 뜻에서 건국학교를 설립했다. 동포사회의 염원을 담은 백두학원은 ‘조국을 일으켜 세운다.’는 숭고한 바람을 담아 ‘건국’이라는 학교명을 사용하였다. 현재는 학교법인 백두학원 건국 유, 초, 중, 고등학교가 있는데, 2016년 11월 현재 총 22개 학급에 재학생이 452명이다. 재일 한국인, 한국에서 온 상사주재원, 유학생, 파견 공무원 등 일시체류민의 자녀 그리고 한국 교육을 희망하는 일본인등 다양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이 한 데 어우러져 우리말과 문화를 배우고 세계화 교육을 받고 있다. 특히 중고등학생들의 전통예술부는 건국학교의 자랑으로 일본 전국 고등학교 종합 문화제의 향토예능 부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또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한마당'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민족학교로서 한정된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고 글로벌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영어권 국가의 학교들과 교류를 강화하고 한국 대학과의 교류 및 진학연계를 강화하여 국제화 시대에 어울리는 인재를 양성하는 미래지향적인 교육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임진왜란의 대본영이었던 나고야 성터는 규슈 올레의 일부이기도 하다. 제주올레는 2011년 규슈관광추진기구와 ‘규슈올레’ 조성을 위한 업무 제휴 협약을 체결하여 규슈 측에 ‘규슈올레’라는 이름의 사용 허가와 규슈올레 코스 개발 컨설팅을 제공, 특히 제주올레를 상징하는 간세, 리본, 화살표 등의 표식을 규슈올레에 적용하도록 함으로써 ‘제주올레’라는 브랜드 자체를 수출하였다. 제주올레는 규슈올레의 업무 제휴비로 첫 해에 100만엔을 받고 1년씩 계약을 연장하며 금액 또한 매년 별도 책정한다고 밝혔다. 규슈 올레는 규슈의 7개 현을 아우르는데 모든 코스를 합치면 장장 198.3km에 이른다. 규슈 올레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나고야 성터(名護屋城跡)의 천수대다. 이곳에 자연과 어울리며 역사 탐방을 할 수 있도록 6개의 산책코스를 설정하였다. 임진왜란의 시발점인 이곳에 규슈 올레가 생긴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올레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줄 수 있는 길이며 앞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은 물론 세계인과 연결시켜주는 길이 되기를 희망한다.
4. 신조선통신사
흔히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지칭한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쉽게 대마도나 시모노세키(下關)에 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나, 불쾌한 과거의 역사는 반일 감정을 일으키고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한(恨)으로 남았다.
1996년 일본, 한국 등 아시아 4개국 유전학자들이 발표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유형을 갖고 있는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다고 한다. 즉 2,0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과 일본 원주민이 섞이면서 야요이 시대(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가 시작되었고, 융합이 서기 600년까지 계속되면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이주자들은 처음에 일본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하고 이어서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통신사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자 일본 막부(대표적으로 대마도)의 요청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공식 사절단이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 통신사는 1607~1811년까지 약 200년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내년 410주년을 앞두고 있다.
5박 6일 동안 2000여 년 간의 시간 공간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두 나라가 협력하여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했다. 과거의 역사 위에 굳건히 서서 두 나라가 세계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할 길이 무엇인지... 이 주제를 고민하는 우리들은 영락없이 21세기 신조선통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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